동반성장은 지속 가능한 번영을 위한 시대정신이다

• 출간일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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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성장은 지속 가능한 번영을 위한 시대정신이다

1.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와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청

한국경제는 인구 5천만 명과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내외를 동시에 달성한 '50-40 그룹'에 진입하며 세계적으로 커다란 경제가 되었습니다. 천연자원과 자본이 턱없이 부족했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국민적 교육열에 기반한 우수한 인적자원 투자와 '하면 된다'는 과감한 도전정신이 결합하여 일궈낸 자랑할만한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정부를 거치며 10년 이동평균 장기 경제성장률은 6%에서 1%대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저성장이 구조화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극심한 양극화와 경제력 집중입니다.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4대 재벌 대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주요 선진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높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근원은 지난 반세기 동안 고착된 '선(先) 성장·후(後) 분배', 즉 수출 대기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 전략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선도 부문을 육성하면 그 온기가 아래로 흐르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가 작동했으나, 글로벌 분업화와 디지털 정보화, 폐쇄적 하도급 관행으로 인해 국내 산업 간 연관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수출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려도 국내 설비투자와 고용 창출, 내수 활성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가 끊어진 것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한국경제'라는 하나의 배에 함께 타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분절을 방치하는 것은 공멸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는' 동반성장(Shared Growth)을 새로운 국가 발전의 축으로 삼아야 합니다.

2. 동반성장의 본질: '협력적 경쟁'과 선순환 메커니즘

동반성장을 둘러싼 오해는 그것이 '가진 자의 파이를 빼앗아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 주는 반(反)시장적 재분배'라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동반성장의 본질은 파이의 크기 자체를 키우면서 분배의 규칙을 정상화하자는 데 있습니다. 예컨대 국민소득이 성장할 때, 과거처럼 대기업과 고소득층이 증분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취약계층과 중소기업에 지금보다는 더 큰 몫이 돌아가도록 유도하여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자는 것입니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이윤 추구는 필수적이지만, 주주의 단기적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주주자본주의 모델은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기업의 가치는 주주뿐 아니라 현장에서 땀 흘리는 근로자, 부품과 원자재를 공급하는 협력업체, 그리고 최종 소비자의 이익이 균형 있게 보장될 때 비로소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국민경제의 선순환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경로가 조화롭게 맞물려야 합니다. 첫째는 대기업과 선도 부문의 성과가 하부로 원활히 흘러가도록 불공정 하도급 관행과 경제력 남용을 시정하는 '낙수효과의 정상화'입니다. 둘째는 중소기업 종사자, 비정규직, 소상공인 등 경제적 약자의 소득과 역량을 선제적으로 확충하여 이것이 소비와 내수 확대로 이어지게 하는 '분수효과'입니다.

보수 일각의 무조건적인 낙수효과 맹신은 기득권의 독과점을 낳았고, 진보 일각의 무리한 분수효과 집착은 시장의 활력을 훼손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양극단을 넘어 낙수효과와 분수효과가 결합하는 '선순환적 경제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동반성장의 핵심 원리입니다.

3. 경제 체질 강화를 위한 실천적 정책 과제

구조화된 경제 불평등을 치유하고 잠재성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응급 처방과 중·장기적 구조개혁이 입체적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첫째, 당면한 유효수요 부진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한 '동반성장 단기 3정책'을 시급히 가동해야 합니다.

1. 이익공유제
대기업이 이루어 낸 이익을 사전계약에 따라 협력 중소기업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 일부의 비판과 달리 결코 반시장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미국의 크라이슬러나 영국의 롤스로이스 등 글로벌 선진 기업들이 부품 공급망 안정과 품질 혁신을 위해 널리 활용해 온 검증된 경영 기법입니다. 미국의 프로미식축구리그(NFL) 역시 TV 중계권료, 상품화 및 라이센싱으로 올린 수익과 입장권 수익 40%를 전 구단이 공평하게 공유하는 제도를 통해 32개 구단 전체가 전력의 상향평준화와 글로벌 최고의 구단 가치를 달성하는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실 이익공유제는 이미 192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자, 배급자, 감독, 배우 간의 협약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2.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
국가의 제도적 특혜와 집중 지원으로 성장한 대기업들이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골목상권과 영세 업종까지 진출하는 지네발식 확장을 억제해야 합니다. 적어도 새로운 진입은 막아야 합니다. 대기업은 첨단 신산업과 글로벌 시장 개척에 매진하고, 생계형 내수 시장은 중소상공인들이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공정한 운동장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3. 정부 사업의 중소기업 직접 발주
조달청과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대형 공공사업을 대기업이 독식한 후 중소기업에 하청을 주는 다단계 수주 구조를 개선하여, 일정 비율 이상의 공공 재화와 용역을 역량 있는 중소기업에 직접 발주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이 자본과 기술, 전문 인력을 축적할 수 있는 독자적 기반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현재 대기업은 천문학적인 사내유보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첨단 원천기술의 부재와 지나친 보수적 경영으로 인해 설비투자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반면 고용의 80% 이상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은 투자할 데는 많으나 자금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상기 단기 3정책을 통해 막혀 있던 자금의 물꼬를 중소기업으로 유도한다면,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경제 회복의 선순환 고리가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중기적으로는 중소기업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자생적인 혁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중소기업이 당면한 가장 큰 애로는 우수 인재의 만성적인 부족입니다.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 근로자의 임금 수준은 50% 안팎에 머물러 있어 청년층의 기피가 심각합니다. 국가 재정을 활용한 사회보험료 감면, 중소기업 취업 조건부 장학금 지급, 장기근속자에 대한 주거 및 자녀 학자금 지원 등 파격적인 복지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우수 청년들이 중소기업으로 유입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부의 R&D 지원 예산을 기존 대기업 중심에서 실질적인 부가가치 창출력이 높은 혁신형 중소기업 위주로 대폭 재배분하고, 산학연 협업 체계를 고도화하여 중소기업의 독자적 기술력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셋째,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불공정과 부패를 일소하고 교육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합니다.

기득권의 불공정 거래와 부패 구조를 청산하여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공정한 사회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교육 부문에서는 과거 산업화 시대의 암기식·모방형 교육 체제를 과감히 탈피해야 합니다. 제가 서울대학교 총장 재직 시절 전국 각지의 다양한 인재를 고르게 선발할 수 있는 '지역균형선발제'를 도입했던 까닭도, 다양한 배경과 경험의 교류 속에서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고가 꽃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등교육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언어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을 갖춘 유연한 미래 인재를 양성할 때 국가경쟁력의 지속성이 확보될 것입니다.

4. 자본주의의 본령과 21세기 '공정한 관찰자'

동반성장은 단순한 경제 정책의 조합을 넘어, 시장경제가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이끄는 근본적인 '사회 작동 원리'입니다. 고전 자본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놓은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1776)』의 '보이지 않는 손'에 앞서 『도덕감정론(1759)』을 저술했습니다. 스미스는 인간 사회와 경제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현려(賢慮, Prudence)'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기둥이 되는 '정의(正義, Justice)'와 사회적 온기를 불어넣는 지붕인 '인혜(仁惠, Beneficence)'가 반드시 병존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가 탐욕을 스스로 제어하고,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해 불공정 거래를 바로잡을 때 비로소 자본주의가 번영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유행하던 신자유주의가 맞이한 총체적 위기는 바로 이 '공정한 관찰자'의 절제와 도덕적 통제를 상실한 채 맹목적인 무한경쟁만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동반성장 정신은 21세기 고도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공정한 관찰자'의 구현입니다. 나와 상대방,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분리된 적대적 경쟁자가 아닌 상호의존적인 동반자로 인식하고, '이타적 이기주의'에 기초하여 공동체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5. 맺음말: 미래를 밝히는 공존의 등대

"한 나라가 바로 서려면 법률가, 학자, 그리고 언론이 기득권에 침묵하지 않고 각자의 도덕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
— 빌헬름 뢰프케 (Wilhelm Röpke), 독일 경제학자

독일의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W. Röpke)는 "한 나라가 바로 서려면 법률가, 학자, 그리고 언론이 기득권에 침묵하지 않고 각자의 도덕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갈파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속적으로 발전이 가능한 경제사회를 만들려는 정부의 단호한 의지, 경제 생태계를 함께 가꾸려는 대기업의 선도적 결단, 그리고 자체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중소기업의 치열한 자조(自助) 노력이 삼위일체를 이룰 때 한국경제는 재도약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동반성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한국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좌우할 시대정신(Zeitgeist)입니다. 성장의 온기가 고루 퍼져 사회적 약자가 희망을 품을 때 계층 갈등과 이념 대립은 자연스럽게 해소되고, 건강한 사회 통합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동반성장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양극화와 저성장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밝고 확실한 등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