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어디로 가나
한국은 스스로도 미쳐 예측하기 어려웠던 속도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냉전 시기에 미국이 제공한 안보와 경제 지원의 힘으로, 그리고 냉전 종식 후에는 미국이 이끈 세계화의 물결에 올라탔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이에 이미 미국 자체의 힘과 세계질서의 바탕에는 거대한 균열과 변혁의 마그마가 응축되고 있었다.
특히 2008년 뉴욕 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미국은 중국을 위시한 주요 신흥국에 비해 성장의 체력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대략 50%에 달하던 미국의 세계경제 비중은 2025년에는 25%까지 축소되었다. 같은 기간 미국의 제조업 비중은 1/3로 줄었다. 일자리를 양산하던 제조업 인구의 소수만이 고소득의 금융서비스와 빅테크에 합류하고 나머지는 상대적 저소득층이 되었다. 세계 속의 상대적 비중 축소와 나라 안의 불평등 확대가 미국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미국의 대외공약과 이행능력 사이의 괴리, 소위 '리프만 갭'을 확대시켰다. 오랜 기간 저류에 흘러온 '미국 우선주의'가 트럼피즘(Trumpism)이라는 모자를 쓰고 표면에 등장했다. 급기야는 트럼프 행정부(2기)에 들어와 관세를 무기로 하여 제조업을 미국으로 강제 이전시키려는가 하면, 유엔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국제적 합의를 파기시키고 있다. 세계는 이런 폭주 현상이 그냥 '트럼프의 미국'에 그칠지, 아니면 '미래의 미국'이 될지를 가늠하고 있다. 2.20 미국 대법원이 무차별 관세를 위법으로 판정한데 이어, 11월 중간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문제는 미국민이 '트럼프의 미국'을 거부하는 선택을 하더라도 트럼프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쓰는 유권자들의 평균적 생산·소비 패턴이 바뀌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바이든 행정부부터 국가 산업정책, 일자리의 억지 귀환, 대외개입 축소와 방위부담 이전, 국제합의의 선택적 이행 등 퇴행적 행태를 보여 왔다. 누가 백악관 주인이 되더라도 내부의 모순을 해외에서 해소하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정책변화는 몸체보다는 옷을 바꿔 입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미국은 앞으로 상당 기간에 걸쳐 안보정책의 뼈대를 1) 대외 공약의 최소화, 2) 개입위험의 억제, 3) 관여비용의 축소에 둘 것이다. 그 구체적 형태는 '세력권 국제질서'로의 회귀이다. 미주대륙과 태평양, 중국과 동아시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서유럽 권역으로 개략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2025년 미국의 국가안보 전략(NSS)과 2026년 국방전략(NDS)은 공히 미·중, 미·러 간 '전략적 안정(strategic stability)'을 강조하고 있다. "강대국의 핵심 안보영역은 서로 존중하자."는 신호이다. 한반도는 누구의 핵심 안보영역에 속하는가?
동아시아는 어떻게 움직이나

중국은 근래 '역사의 바른편'을 들고 나오고 있다. 냉전종식 이후 먼저 미국이 헤겔과 맑스를 관통해왔던 이 담론을 동원했다. 권위주의 국가들에 대해 '역사의 바른편'으로 올 것을 권유한 것이다. 그런데 시진핑의 등장 이래 중화사상에 기초한 '서강동승'의 세계관을 펼치면서, 중국이 이끄는 '역사의 바른편'에 주변국부터 가담하라는 것이다.
중국은 미·러 중심의 전략무기 감축협정에 참여하지 않은 채, 핵무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세계적 핵 군비경쟁이 재연 중이다. 게다가 중국의 2027년 대만 침공설이 떠도는 가운데 시진핑은 군의 온건 지도부를 축출 중이다. '대만 유사시 일본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대한 일본 총리의 발언으로 고조된 중·일 갈등의 휘발성이 가라앉을 가능성은 더욱 멀어지고 있다.
일본은 미·중의 변화를 직시하면서 2월 총선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이끄는 보수 자민당에게 전후 정치에서 유례없는 압승을 안겨주었다. 일본은 내년까지 국민 총생산의 2%를 방위비에 투입할 예정이다. 2022년까지 유지된 1% 선에서 5년 만에 두 배가 된다. 군비증강에 대한 일본 내의 찬반 대립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재무장이 '점차, 그러다 갑자기' 양상을 띨 수도 있다.
일본은 이미 2025년 통합 작전사령부를 설치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태세 정비에 들어갔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비울 공간에 대비하는 동시에, 대미 안보의존으로 제약받는 국가자율을 확대하려는 욕구도 작용하고 있다. 지금 유럽에서 대두되고 있는 독일의 패권국 등장 가능성이 동아시아의 눈에도 새삼스럽게 보이는 이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휴전이든 종전이든 조금이라도 러시아 쪽에 기우는 선으로 갈 개연성이 크다. 서유럽과 중국에 대해 러시아라는 무게를 활용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계산도 다분히 작용한다. 그 여파로 숨을 돌릴 수 있는 만큼 러시아는 한반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라브로프 외교장관은 지난 2.11 의회(Duma)에서, "북한의 핵은 번영을 위한 보장이며, 더 이상 북한에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러·북의 군사협력, 첨단기술, 인력, 에너지·식량 지원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한편, 북한의 김정은은 간판정책인 '핵·경제 병진'의 부진에 따른 대내외 난관을 모면하는 방책으로 2023년 말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선언했다. 애초부터 불법 핵보유국이 제재를 벗어날 가능성이 희박했기에 병진정책도 가당치 않았다. 하지만 미·중 대립이 격화되고 러·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제는 중·러로부터 중첩된 안보와 경제의 지원을 얻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미·북 대화와 남·북 대화를 결합한 한반도평화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핵포기가 결코 불가능한 북한은 탄탈로스의 연못처럼 대화 문턱을 조절하면서 상대를 목마르게 한다. 설사 미국과 합의를 이루더라도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 되뇌는 '평화공존'은 '북한 핵의 威脅'과 이에 대응하는 '미국 핵우산의 威力'아래 생존해야하는 불합리한 상태를 말하는 데 그칠 공산이 크다.
한국이 갈 길은
한국은 지금이라도 미국이 안보우산을 접으면 구명조끼 없이 급류에 쓸려 갈 처지에 있다. 그런 한국에게 국가운명의 상수가 되어온 미국의 안전보장이 양적·질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눈앞에 등장했다. 관세를 무기로 동원한 미국의 압박 앞에서 한국은 경제규모가 10배인 유럽연합, 2.5배인 일본과 비슷한 규모의 투자를 약속해야 했다(정부 관여 민간 투자 포함). 안보를 절대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한국의 취약한 협상 환경이 추가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생존과 번영, 그리고 '체통있는 평화'를 위해서는
전략적 자율성이 절박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무엇보다 안보의 과도한 대미의존을 줄이고 경제의 대미·대중 편향을 완화시켜야 한다. 경제는 기본적으로 민간의 합리적 판단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정부가 정책과 제도로 뒷받침해주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반면 안보영역에서는 정부 정책이 그대로 현실에 반영된다. 첫째는 한·미 동맹을 자립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남·북의 핵 불균형 극복이다. 한국이 핵무장하여 남·북 핵균형을 만들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핵우산이 작동하는 한, 갈 길이 아니다. 정치, 안보, 경제의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대안은 핵비확산 체제(NPT) 내에서 평화적 목적의 핵능력 기반을 확보해두고 유사시에 대처할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 권능의 확보이다. 한반도의 안보구도를 '미국-북한'에서 '남한-북한'으로 바꾸는 길이다. 미국도 강조하듯이 한·미 동맹을 기본전제로 작전권을 전환 하는 것이다. 작전권을 넘긴다고 해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대통령이 국론을 결집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결단과 집중력을 갖고 대미 협상을 지휘해야 한다.

둘째는, 통일정책과 남북관계에 대한 근본적 자세 전환이다. 합의에 의하건 흡수를 통하든 '통일'이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자체가 역설적으로 통일을 멀리 보낼뿐 아니라, 한국의 대외 자율을 제약한다. 통일은 설계가 아니라 '정상적 이웃'으로 지내면서 다가올 수 있는 하나의 결과로 상정해야 한다. 지금 한국은 주변 어느 국가도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 '비핵화'와 '통일'을 목표로 내걸어 둠으로써, 모두에게 '을'이 되는 처지를 자초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이나 독일 수준의 평화적 핵능력을 최대한 갖추면서, 북한에게는 "간섭하지 않을테니 핵을 들고 사는데 까지 살아 보라!"고 해야 한다. 그게 '안정과 공존'의 길이다. 토마스 셀링(Thomas Schelling)이 제시하듯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쏘지 않는다. 그러나 나오면 쏜다."는 '보장과 억지' 태세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힘'이 '합의'에 의한 평화를 대체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과 시진핑의 중국은 물론, 2차 대전 패전의 무게에 눌려온 독일과 일본까지 모두 '힘'을 강조하고 있다.
평화적 핵능력 구축, 군사작전 통제권능 확보, 보장과 억지 원칙에 입각한 남·북의 '정상적 이웃' 관계 설정이야 말로 한국이 갖추어야 할 '힘'의 세 가지 기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