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세상이 오고 있다

출간일 202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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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세상이 오고 있다

1.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형성

2025년 현재 국제정치 변화의 핵심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국내정치와 달리 국제정치 영역에서는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무정부 상태에서 국가들이 스스로의 안보를 지키는 기본이 힘(권력)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국제정치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었고 그 결과 전쟁이 수시로 벌어졌다.
1914년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서도 군인과 민간인 1,7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러자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했다. 강한 나라나 약한 나라나 모두 함께 모여 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원의 고립주의자들의 반대로 정작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다. 그 결과 국제연맹은 힘이 빠져버렸고 1930년대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그리고 일본이 만주를 불법 침략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에 더해 보호주의 무역과 대공황으로 세계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이 득세했다. 급기야 세계는 2차대전으로 치달아 군인과 민간인 7,100만 명이 사망했다.
이에 2차대전 종전을 전후해서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두 대통령은 다시 한번 규범이 작동하는 세상을 위해 유엔을 창설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립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맹아는 1941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가 만나 체결한 대서양헌장에서 싹텄다. 대서양헌장의 3가지 핵심은 영토주권 존중, 자유무역, 그리고 민주주의였다. 이는 1942년 1월의 26개국연합국선언, 1945년 10월 발효된 유엔헌장으로 확장되고 구체화 되었다. 국제정치 차원에서는 타국의 영토주권과 자결권을 존중하고 다자주의 정신에 의해 창설된 국제기구와 규범을 지켜나가자는 것이었다. 국제경제 차원에서는 자유무역과 개방 경제를 통해 시장의 효율성을 살려 번영을 구가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내정치 차원에서는 고귀한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구현하자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형성

2.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붕괴

이러한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기복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작동해서 지난 80년간 지구촌은 과거보다 훨씬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다. 그러나 그 질서가 최근 20여 년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중국은 2016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을 무시한 채 남중국해를 자국의 영해로 주장하면서 영유권을 강제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영토를 무력 침공했다. 충격적인 일은 2025년 취임 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랜드, 캐나다, 파나마에 대한 영토 확보 의사를 표명한 것이었다.
자유무역 규범 또한 20여 년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유무역 국제질서의 기둥이었던 세계무역기구(WTO)는 무력화된 지 오래다. 중국의 지적재산권 위반, 보조금 지급, 외국 기업으로부터의 강제 기술이전 등 불공정 관행을 비판해오던 미국은 이제 중국과 비슷하게 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국내 산업 보호와 재건을 위해 보조금과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 보호무역으로 치닫고 있다.
또한 국내정치 측면에서도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의 진전 과정에서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정치적 불만이 고조되었다. 여기에 이민 문제까지 겹쳐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튀르키에 등에서 극우 및 권위주의 지도자들이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2024년 현재 지구 인구의 75%가 독재 정부 치하에서 살고 있는데 이는 1978년 이래 최고 비율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형성

3. 트럼프 2기의 출범과 국제 리더십의 포기

트럼프 2기의 출범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지난 수십 년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지를 위해 리더십을 행사해 온 것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피해만 보았다고 생각한다. 안보 측면에서 동맹국들은 정당한 몫의 기여를 하지 않고 무임승차하면서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다. 국제경제 측면에서도 세계화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이 무너졌고 중국과 같은 국가들이 미국의 일자리를 탈취해갔다고 생각한다. 자유무역을 통해 미국의 무역상대국들이 부당한 이득을 취했고 달러가 기축통화 역할을 하느라고 고평가되는 바람에 무역수지 적자도 누적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은 민주주의 동맹국들보다도 권위주의 국가나 극우 정당들의 지도자들과 더 친근하게 지내며 지원하고 있다.
이같은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 포기의 배경에는 3가지 구조적인 요인이 깔려있다. 첫째는 중국의 상대적 권력 상승이다. 1970년대 닉슨-키신저 행정부의 대중국 포용 정책으로 안보 우려가 사라지자 중국은 경제발전에 매진했고 그 결과 경제가 급성장했다. 1980년에 미국의 명목 GDP의 8%밖에 안 되던 중국 경제는 40년 만에 70%까지 추격했다. 이제 자신감을 갖게된 중국은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터지자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버리고 ‘분발유위(奮發有爲)’의 공세적 외교 노선으로 전환했다. 이에 추가해 러시아, 이란, 북한이 중국을 중심으로 연대를 강화하면서 미국의 리더십에 정면 도전하기 시작했다.
둘째로 세계화의 정치적 부작용을 미국의 역대 정부는 해소해 내지 못했다. 철강, 자동차 등 전통적인 제조업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실업자가 된 러스트벨트의 저학력 노동자들의 삶을 충분한 사회복지 제공, 재교육, 직업훈련 등을 통해 품어 안지 못했다. 이들의 분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더욱 커졌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러한 분노를 대변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당선되었다. 트럼프 2기가 반세계화, 반이민, 반중국의 방향으로 치닫는 것은 그러한 정치적 배경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경제는 지금 빚더미 위에 올라서 있다. 연방정부 부채는 37조 달러(2025년)에 달하고, 이자 지출은 매년 8,800억 달러로 국방비 지출 8,500억 달러를 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국방비 증액을 압박해왔다. 그리고 군사전략도 중동과 유럽에서 손을 떼고 중국 억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인들이 미국으로하여금 국가이익을 포괄적, 장기적 관점에서 정의하고,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리더십을 행사할 여유를 잃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세계는 지금 혼돈 속에 처해 있다. 국제적 리더십의 공백이 생겨나면서 힘의 논리가 규범을 대체하고 있다. 영토주권 존중에 대한 관념이 약화되고 전쟁은 빈번해지며, 미국발 보호주의 관세전쟁이 진행 중이다. 미국의 세계 전략의 한 축이었던 나토 동맹의 미-유럽 관계가 흔들리면서 유럽은 자체 방위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또 다른 축인 미국-일본, 미국-한국 간의 동맹관계도 관세 및 투자 압박에 더해 핵확장억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도 없어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 미중 간에는 외교, 군사, 경제, 기술, 이념 등의 전 분야에서 전면적 대결 구도가 심화되고 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냉전기 미소 간에 존재했던 최소한의 소통 채널도 없어서 의도치 않은 무력 충돌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다른 한편 기후변화, 전염병, 핵확산, AI 리스크 등 인류 공통의 과제 해결을 주도해야 할 다자기구들은 더욱 약화되고 있다.
트럼프 2기의 출범과 국제 리더십의 포기

4. 한국의 대응 전략: 자강, 동맹, 글로벌 전방위 외교

그렇다면 한국은 앞으로 어떠한 대외 전략을 추구해나가야 할 것인가?
첫째, 법이 멀어지고 주먹이 가까운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략은 자강이다. 구체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해서 외부의 무력행사에 대비해야 한다. GDP의 2.3%를 차지하는 국방비를 단계적으로 10년 이내에 3.5%까지 늘리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고 한다. 증액되는 국방비는 현대전의 변화양상과 북한의 군사력 고도화를 반영하여 드론, AI 분야 등 신 군사기술의 도입에 집중 투자되어야 할 것이다. 사용후핵연료 보관 문제 및 우라늄 원료 수입의 공급망 불안정성 해소, 소형원자로에 맞는 새로운 우라늄 원료개발 등을 위한 한미원자력협정의 개정도 긴요하다.
둘째, 거래적인 관점에서 한미동맹을 접근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핵확장억제 등 안보 공약을 지속시키는데 최선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미동맹의 강화가 미국의 국익과 전략에 부합한다는 점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해나가야 할 것이다. 미국 내 제조업 부흥을 지원하기 위한 한미 간 산업 협력이 양국 간 동맹의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양국 내부에 산업별 협력의 사령탑 역할을 하는 특임 대사와 같은 직책을 신설하여 혼선을 피하고 효율적, 체계적으로 협력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글로벌 차원의 전방위 네트워크 외교를 펼쳐나가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국제질서의 대변환은 한국으로하여금 한미동맹 외교는 지속해 나가되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방책을 필요로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관심을 경제적 압박에 투입하고 한미동맹, 핵확장억제, 한미일 3자협력에 대한 미국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언급을 피해왔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북미회담 재개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 관점에서 북한 문제에 접근하면서 한국의 안보 우려를 등한시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또한 트럼프 리더십의 특성상 지금 적대하고 있는 중국과도 어느 시점에서는 대타협을 시도하여 국제정치를 세력권 정치화의 방향으로 틀 수도 있다. 그 경우 한국이나 일본의 지정학적 위상은 대단히 불투명해질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글로벌 전방위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한국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해 둘 필요가 있다.
글로벌 전방위 외교의 첫 번째 상대국은 ‘뜻이 맞는 국가들(like-minded countries)’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약화되는 추세라고 할지라도, 한국의 국민들은 아직도 민주주의와 규범 기반 국제질서가 유지되는 것을 강력히 희망한다. 2024년 12월 계엄 선포 이후 보여준 국민적 열기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증명한다. 또한 규범기반 국제질서가 유지되어야 강한 주변국의 자의적 행동을 억제하는 데 유리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 유럽, 호주, 캐나다 등 뜻이 맞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특히 일본과 한국은 동병상련의 위치에 있다. 북한의 증가하는 위협 앞에서 미국의 흔들리는 방위 공약을 우려하고 있고, 항행의 자유 등 규범 기반 질서의 유지를 통해 활발한 무역과 대외경제 활동을 원하고 있다. 이같이 비슷한 처지의 양국이 상호 간에 경제 및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각자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심각한 위협을 느끼는 유럽의 민주국가들도 선진국 지위에 진입한 한국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에 대한 기대가 크다.
글로벌 전방위 외교의 두 번째 타겟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다. 그동안 한국은 동북아 4국과 북한에 집중된 외교의 틀에 잡혀있어 왔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전략적 위상 설정을 할 것이냐, 북한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이냐는 물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한국의 외교가 그것에만 잡혀있기에는 국제정치적 위상이 상당히 커졌다. 이제 우리의 외교적 시야와 공간을 넓혀야 할 때다. 예를 들어 한국 경제의 대미, 대중 의존도는 너무 높다. 그러다 보니 미중 간의 무역 및 기술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국가가 한국이다. 따라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여 경제의존도를 다변화하고 글로벌 공급망의 안정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도는 곧 세계 3위 경제 대국이 될 잠재력을 가진 민주국가이기에 전략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CPTPP에도 가입하여 우리의 경제외교 영역을 확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처럼 세기적 위기의 시대에 더욱 절실한 것은 국론의 통합이고 이를 위한 정치권과 여론 주도층의 노력이다. 세계가 요동치며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데 국내 정파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최근 들어 ‘동맹파’다, ‘자주파’다 라는 용어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이다. 국민들이 국가이익을 전면에 내세워 단합할 때 주변 강대국들이 한국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난세에 나라를 잃었던 구한말의 경험이,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심각히 흔들리는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한국의 대응 전략: 자강, 동맹, 글로벌 전방위 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