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s Korean democracy revived?

Publication date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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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주의는 살아났는가?

정치권의 석고대죄는 없었다

꼭 일 년이 지났다. 망연자실했던 그 밤의 드라마,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한국 민주주의를 끝장낸 난데없는 쿠데타의 밤. 국민 모두 잠을 못 이뤘던 악몽은 이제 점차 멀어지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G10 선진국 한국에서 쿠데타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검찰 출신 대통령을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 장갑차를 막아섰고, 국회에 진입한 특전단을 설득해 진로를 막았다. 야당이 아무리 집권당의 행로를 가로막은들, 검탄(검사탄핵), 감탄(감사원장 탄핵), 예탄(예산삭감)을 발동해 통치권을 무력화한들, 법과 제도를 우회해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뒤엎은 쿠데타인 것은 확실하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그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촉발한 여러 원인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발뺌하는 것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민주주의는 2024년 12월 3일 밤에 죽었다. 그것은 정치권 전체의 파탄이기에 자신과는 여전히 무관하다고 강변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양식 없는 자다. 정치권 모두 광화문 광장에 꿇어앉아 위임받은 주권을 잘못 관리했다고 석고대죄했어야 옳았다.
정치권의 석고대죄는 없었다

적대 정치는 여전한데

적대 정치 엔솔로지
민주주의의 사망 책임은 정치권 전체의 몫이다. 야당은 쿠데타가 무위로 돌아간 즉시 ‘내란 척결!’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민주주의를 되살리는 명의(名醫)임을 내세운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을까. 야당은 결국 책임 전가에 성공했다. 집권당이 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살려냈는가? 필자가 보기에 사망 선고는 아직 유효하다. 민주당 정권 6개월이 지난 이 시점까지 여태 깨어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 이후 암처럼 번진 적대 정치를 청산하기는커녕 증오와 적의를 ‘정의’로 회칠하는 구태는 여전하다.
지난봄, 쿠데타 악몽에 짓눌린 필자가 한국 민주주의를 연명할 방안을 찾아 헤맨 결과가 『적대 정치 엔솔로지』(2025, 나남)였다 (사진). 제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몇 가지 고질병은 고쳐달라는 애원이었다. 불통 정치, 적의 정치, 이념 정치, 공론왜곡 정치, 그리고 정책부작용 축소. 민주주의란 민의(民意) 대변이지 정치인들의 집단 의사를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님을 수도 없이 말했다. 그 중 ‘청산의 정치’를 가장 경계해 달라고 호소했다. 청산의 정치는 기존 정권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주요 인사를 유배 보내는 잔혹한 정치다. 그러나 이재명 정권 6개월간 더했으면 더했지 변한 것은 없었다. 적대 정치는 한국 정치의 풍토병으로 고착됐다.

사람 척결의 정치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큰 정치인이다. 그들은 분풀이 정치를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정치적 박해를 많이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보복의 정치를 아예 버렸다. 외환위기가 코앞에 닥친 탓도 있었겠지만 민주주의의 윤리적 초석을 다지는 데에 주력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등장한 정권들은 선배 정치인의 미덕(美德)을 승계하지 않았다. 4대 악법 청산! 수많은 사람들이 친일명단에 올랐고, 사학비리 혐의를 뒤집어썼다. 이후 정권들은 인적 청산과 이념 청산, 정책 실패의 전가라는 비민주적 행태를 반복했다. 대통령의 수난 시대가 개막됐다. 이른바 적폐 청산의 주역이 적대 정치의 희생자가 됐다. 보수 정권의 세 대통령은 모두 감옥에 갔다. 윤석열 대통령은 초췌한 표정으로 법정을 들락거린다. 진보정권이라고 다를까. 보수의 보복 정치에 걸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정권의 오류와 시행착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열심히 떠벌리는 중이다.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 퇴근길에 소주 한잔 하겠다는 서민적 언약을 기억조차 못한다. 이재명 현 대통령은 소란한 진보정치의 폐해를 의식해서인지 지난 6개월간 말을 아꼈다. 다섯 대통령 모두 관용과 화해, 협의와 타협정치를 약속했건만 적대 정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는 진배없는데, 이재명 대통령의 신중한 언행 뒤에 어떤 은밀한 기획이 숨어 있는지 조마조마하다.
민주주의는 제도와 윤리로 작동한다. 제도 개혁도 ‘사람 척결’이 숨은 의도라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망이 없다. 이재명 정권 역시 다를 바 없다. 검찰청 폐지, 방송통신위원회 폐지가 결국은 사람 척결을 목표로 한 거칠기 짝이 없는 행보다. 이재명 정권 6개월간 가장 공들인 것이 검찰청 폐지이고, 한국의 경제구조와 역사적 진화 과정을 무시한 채 밀어붙인 ‘노란봉투법’, ‘더 센 상법’, ‘재해안전관리법’이 뒤를 잇는다. 예나 지금이나 검찰은 ‘정치검찰’ 오명을 씻지 못한다. 그럼에도 검찰청을 쪼개 행안부 산하로 재편하면 정치권 재량은 더 증폭한다. 민노총에 대한 정치적 보답 목적이 뚜렷한 경제법안들은 서민 생계에 활력을 줄까? 야당과의 협의를 거쳤다면 민주주의를 되살렸다고 평가받겠지만 다수당의 힘을 행사한 독단이었다.
세 개의 특검이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자 현 정권은 특검 기한을 연장했다. 내란 연루 세력을 더 넓게 잡아 군 장성과 영관급 장교를 대거 물갈이 명단에 올렸고, 고위공직자로 수사 범위를 확대했다. ‘잘 골라내세요’...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그렇게 발언했다는 소식에 필자의 가슴이 무너졌다. 사람 척결은 적대 정치의 인기 메뉴이며, 2000년대 모든 정권의 오류와 실패를 답습한다는 명백한 시그널이다. 아직 멀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 피바람이 불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을 향할 것이다. 그것도 정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가드레일 파괴 징표들

민주주의는 가드레일이 필요하다. 정치체제가 가드레일 바깥으로 뛰쳐나가면 독재가 기다린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제모을루(Acemoglu)는 그 영역을 ‘좁은 회랑’으로 개념화했다. 국가와 사회가 서로 견제하는 긴장된 영역에 정치체제를 머물게 하는 일, 그러려면 정치인은 윤리적 자기검열을 가동하고 유권자는 감시의 눈을 번득여야 한다고. 그게 어디 쉬운가. 한국의 정치체제는 자주 국가 쪽으로 뛰쳐나갔다가 선거를 통해 회귀하는 위험한 과정을 되풀이했다. 경고음이 들리지 않는다. 정치적 역량으로 내부 갈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독재 권력에의 유혹을 낳는다. 남미, 동남아시아, 유럽에서 독재 성향을 띤 지도자가 출현했다. 언론방송을 장악하고, 경쟁자(야당)를 탄압하고(합의정치 폐쇄), 사법부와 입법부를 장악해 ‘사법의 정치화’를 꾀하며, 군부와 경찰을 동원해 저항 세력을 분쇄한다. 법의 이름으로 말이다.
윤석열 정권에서 이 몇 가지 징표들이 뚜렷하게 불거진 것이 사실인데, 내란 척결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등장한 현 정권 역시 그런 트랩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가드레일 파괴 징표들이 선명하다: (1) 추경호 전 당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상정에서 보듯 야당을 ‘내란 정당’으로 낙인찍어 해산까지를 도모하는 것; (2) 언론방송에 친정부 인사를 앉히려 하는 것; (3) 대법원장을 내친 후 자기 진영 인사를 임명하려는 것 (‘조요토미 희대요시’ 팻말을 든 여당 의원의 어처구니없는 짓)과, 대법원 판사를 증원해 자기 사람을 앉히는 것, 검찰청을 조각내 ‘사법의 정치화’를 꾀하는 것; (4) 내란 특검 수사대상을 군부와 공무원 전체로 확대하는 것, 등등.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지목한 네 개의 민주주의 위기 신호가 여전히 명멸한다.
2025년 정기국회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대목이 주로 이런 쟁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회의 모든 위원회를 여당이 독점한 상황에서 강성 집권당은 독점 정부를 향한 기초설계를 충실히 수행했다. 예산결산위원회가 집권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예산 항목들은 윤석열 정권에서 자신들이 전액 삭감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웃지 못할 풍경을 연출했다. 집권당의 ‘내란 척결’ 구호는 ‘자신은 민주, 상대는 독재’를 맹신하는 무사의 칼이다. 내란 척결의 목적지는 쿠데타를 빚어낸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재설계와 정치 양식의 교체여야 한다. 여야 의원 간 ‘배치기 희극’까지 벌어지는 현 정국은 쿠데타 이전과 무엇이 다른가.
가드레일 파괴 징표들

익명의 비전문적 오류들

이재명 대통령은 비교적 말을 아낀다. 조용하다. 집권당 정청래 대표가 가케무샤로 나섰기 때문이다. 거칠고 시끄럽고 막말을 쏟아내는 집권당 대표의 대리전 수행에 대통령이 나설 필요가 없다. 대통령 의도와 엇박자가 나면 살짝 뜻을 전달하면 그만이다. 당정이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잘 돌아간 적이 없다. 그럴수록 야당의 위상은 쪼그라든다. 존재감이 없다. 정권의 잘못된 판단도 독점 의욕에 묻힌다. 이재명 정부의 조각(組閣)에 몇 달이 걸렸다. 급작스레 정권을 이양받았으니 그럴 만하지만 어의없는 광경이 몇 번 연출됐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어느 날 부산행 열차를 운행하는 도중에 임명 소식을 들었다. 민노총 출신이라 노동 지식은 있겠지만 고용, 그것도 한국 전체 고용시장의 구조와 역학을 잘 알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기야 장관직에 반드시 전문지식이 필요한지는 논란거리다). 교육부 장관에는 세종시 교육감이 등용됐다. 대학 교육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AI시대 대학교육과 청년 인재를 키우는 특단의 정책은? 불안하다. 여성가족부 장관에 지목된 강선우 의원은 갑질 논란으로 기어이 낙마했다.
트럼프의 관세 공격을 그런대로 선방했다고 평가되는 경제팀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기재부 출신 구윤철 부총리, 기업 출신인 김정관 산통부 장관과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 교수 출신인 하준경 경제수석, 이 정도의 경륜과 팀워크로 난국을 돌파할 수 있을까? YS와 DJ의 경제팀은 전문지식이 넘쳤고 노련했다. 전두환 정권은 빼어난 경제팀 실력으로 무력 탄압의 오명을 잠시 덮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현 정권의 경제팀, 주요 부처 장관들은 익명이자 비전문적이다. ‘실용 정부’라고? 그래서 느닷없이 내놓은 게 ‘9.7 주택정책’이었다. 사뭇 달라진 주택시장의 내부 구조와는 무관하게 문재인 정권이 대패한 주택정책을 답습한 모양새였다. 규제 지역을 경기도 일원으로 확대한 것 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주택정책을 23차례 수정하고도 집값 폭등을 못 잡았던 문재인 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최저임금제에 54조 원을 쏟아붓고도 고용 하락을 막지 못했던 문정권의 치명적 실수를 답습하려 하는가?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대변과 책임이라는 민주주의의 두 요건을 충족하려면 국가 정책은 숙의와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누가 정책을 만드는가? 잘 모른다. 익명의 비전문가들이라면 그들은 누구를 대변하고 누구에게 책임지는가? 답은 아리송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 ‘민주주의는 살아났는가?’에 긍정적인 답변은커녕 희망적 기대도 갖지 못한다. 쿠데타 이후 일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익명의 비전문적 오류들